내면에 몰입감과 혼란스러움 가득했던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다. 장편이 아닌 단편 모음집이라서 그런지 각 단편소설마다 그런 감정을 느껴서 쉬지 않고 휘몰아치는 거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의 표지도 인상 깊어서 좋았고, 검색해 보니까 혼모노는 ‘진짜’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 ‘ほんもの’를 사용하여 만든 신조어라고 하는데,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저자 인터뷰에서 본 내용인데, 또 다른 의미로는 온라인에서 일본 문화에 심취하신 분들을 조롱하는 뜻으로도 사용한다고 하는데, 사실 개인 취향 존중한다는 내 마인드에서 굉장히 어렵다고 느껴지는 단어였다.
사실 소재 또한 일반적으로 '비정상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그게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비정상적이면서 묘한 심오함이 계속 나를 붙잡았다. 솔직히 이 정도 몰임감이면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지만, 나의 정신적인 피로감을 덜기 위해서, 그리고 휘몰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출퇴근길을 활용해서 읽었다. 하루는 2 챕터 읽고, 어느 날에는 3 챕터 읽고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단편소설집이 좋지 아니한가. 물론 그만큼 몰입도가 있는 소설이면 가능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유 있게 읽는 게 좋다.
각 단편 소설별로 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책 타이틀인 [혼모노]는 실체가 불분명한 장수할멈이 깃들어야만 진짜 무당이 되고 다른 사람은 가짜가 되는 문수와 신애기의 이야기 /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잘못을 저질러 대중의 질타를 받는 영화감독과 그를 추종하듯 좋아하는 팬클럽의 이야기 / [스무드]는 재미교포 3세인 주인공이 처음 한국에 방문했다가 성조기와 태극기를 든 시위대 행렬에 섞이는 이야기 /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초창기 건축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인데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공포 소설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해서 [우호적 감정] 부장급 인물이 젊은 세대와 한 팀을 이루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 [잉태기] 할아버지와 엄마에게서 삶을 강탈당한 딸의 이야기는 마치 "폭삭 속았수다"의 영범이와 같았고, / [메탈] 고교 시절 세 친구의 우정을 다룬 청춘 단편소설이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야생의 본능을 상실한 호랑이는 무기력하게 몸을 내어주고 있었다.
미약하게 그르릉거리는 순간도 있었으나 사육사가 고무망치로 앞발을 내리치자 금세 잠잠해졌다. (…)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혼모노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이것은 나와 저 애의 판이다. 누구의 방해도 공작도 허용될 수 없는 무당들의 판이다.
(…) 이제는 내 차례다. 수박도 쩍 갈라놓을 만큼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이 살갗에 닿고 신경을 지난다. 나를 보는 신애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피가 흐르고 있겠지. 이미 입안에서도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니까. 하지만 중요치 않다. 아픔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여재화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보승은 화색을 띤 채 말을 이었다.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우호적 감정
사람들과 섞여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다 딤섬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얇은 피가 터지며 뜨거운 육즙이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서로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고 술잔을 채워주며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정이 흘러넘치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 안에서,
나는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기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잉태기
시부의 말처럼 나 정말 미친 게 아닐까. 미쳐서 손윗사람에게 부려서는 안 될 표독을 부린 게 아닐까. 도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게 아닐까. 그의 말처럼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내 아이에게 지게 한 건 아닐까. 그런데…… 내가 미쳤다면, 정말 미쳤다면 무엇이 나를 미치게 한 걸까.
메탈
잊고 싶었지만 깊숙이 잔존해 있던 여러겹의 기억. 귓가로 흘러들어와 온몸을 한 바퀴 훑고서도 빠져나가지 않던 격렬한 열기.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두려워하지 않고 한길을 내달리고 같은 꿈을 꾸던 소년들……
추가적으로 최근에 진행한 성해나 작가의 인터뷰한 기사인데, 슬그머니 링크 공유해본다.
작가의 의도나 생각을 조금이나마 작품 이해하는데 도움도 되고, 작품을 더 즐길 수 있으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
성해나, 삶을 속단하지 않고 신중하게 보는 마음 | 예스24 채널예스
넷플릭스보다 성해나의 책. 『혼모노』를 읽은 뒤 박정민 배우의 이 추천사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ch.yes24.com
- 저자
- 성해나
- 출판
- 창비
- 출판일
- 202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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