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를 통해서 프롤로그를 읽고 나서 바로 서점에 가서 구매한 책이다. 사실 요즘 책은 그런 유혹을 일으키게 하는 책이 보기 힘들다. 이북이 핫한 것도 있고, 종이책은 상대적으로 무겁기 때문에 그런 듯한데, 그래도 종이의 질감이나 냄새 때문에 항상 포기하지 못하고 구매하게 된다.
거의 2주에 가까운 시간을 이 책에 쏟아부었던 거 같다. 보통 소설과 함께 남독하긴 하지만, 이 책은 오로지 본인에게만 집중하라는 뉘앙스를 뿜어냈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고 말이다. 사실 난 이 책의 표지보다는 측면에 위치한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디자인)하라. 이 괄호 안의 무궁무진한 언어로 대체할 수 있고, 내가 알고 있는 단어가 아닌 새로운 단어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각 저자의 소개란에 인상 깊은 말이 있는데, 유영만 교수님의 소개란에는 "앎으로 삶을 재단하기보다 삶으로 앎을 증명하며 어제와 다르게 살아보려고 오늘도 안간힘을 쓰는 지식생태학자"이다. 박용후 디자이너의 프로필에는 "'언어 톺아보기'를 관점 디자인에도 활용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당연함에 "왜?"를 던지고, 사전 속에 갇히지 않으려는 유연함으로 현상의 이면과 뿌리까지 파고든다."가 인상 깊었다.
세상에는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없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관계가 있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언어를 대개로 변화된 놀라운 사유혁명이 아닐 수 없다. 관계라는 언어로 세계관이 새롭게 채색되면서 나는 사람과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의 언어로 싸야만 나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나다운 글이 된다. 결국 '나다움'이란, 나의 체험을 나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놀랍게도 나의 언어로 쓴 글은 가장 나다운 길로 안내해주는 나침반이자 등대다. 글쓰기는 살아온 삶을 농축하기도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삶을 인도하고 안내하기도 한다.
다른 언어를 갖는 게 중요하다. 언어가 달라지면 사고가 달라지고, 사고가 달라지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 더 나아가 삶 전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만의 개념사전을 갖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책도 시간이 지나면 개정판을 내듯이, 사전(辭典)도 사전(死典)이 되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개정하고 증보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결국 언어를 매개로 한 사고활동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반추해보고 나의 체험적 느낌과 깨달음으로 재정의해보는 노력은 사고혁명의 중요한 시발점이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서 신념, 관점, 연상, 감성, 은유, 어원, 가치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가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적 없다. 그런데 위아래 기재된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단어"나 "숨 쉬는 것"이라는 것. 감성적인 글이 아니면 최근에 반복적으로 읽은 점이 없는데 오래간만에 같은 페이지들을 계속해서 읽게 됐다.
말이란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때가 되면 죽는다. 때문에 사는 동안 말과 삶이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세계를 포착해야 한다. 살아 숨 쉬는 말을 수집하고 싶다면, 시끌벅적한 시장이나 다양한 관점이 오가는 격정적인 토론회에 참석해보길 권한다. 단어와 욕망의 관계를 파헤치면 그 단어를 통해 어떤 문제의식을 드러내려 하는지, 지금 겪고 있는 결핍과 아픔이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도 보인다.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거나 재정의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 개념이 불만족스럽고 불편해서다. 똑같은 단어라도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거기에 담긴 욕망이 다르다.
- 저자
- 유영만, 박용후
- 출판
- 쌤앤파커스
- 출판일
- 202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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