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녀간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많이 보인다. 일부러 찾아보는 것도 아닌데, 서점에 가면 꼭 보이는 거 같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책들이 출판되지 않았는데, 여성 주체성에 대한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모녀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 등 가족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작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베스트에서 스테디셀러로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읽지 않았다. 가족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 소재의 책은 기피하게 되었던 거 같다.) 최근에 포스팅 한 글 중에서도 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도 비슷한 유형에 가까웠다. 

오늘의 책 [H마트에서 울다]는 모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투병에 대해서 딸이 기록한 글이며, 혼혈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딸이 쓴 글이다.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건 엄마에 대한 딸의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그녀의 성장 환경이 왠지 "이방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유난히 기억이 남았던 거 같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숨쉬며 살아간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거 같아서 어린 저자에게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백인과 아시아인을 외적으로 표현하자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한국인 사이에서도,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국인 사이에서도 말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국여행은 신혼여행이기도 했지만 엄마와의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서 남편인 피터와 한국을 경험했던 거 같다. 서울, 부산, 그리고 제주도. 나도 가보지 못했던 곳도 나와서 놀랐고 말이다. 대표적으로 부산에 있는 자갈치 시장은 방문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시장 구경을 하지도 못한 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표지>


우리 엄마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언제나 열 발짝 앞을 내다보는 사람. 엄마는 단숨에 그려볼 수 있었다. 평생 다이어트의 압박에 시달리는 외로운 삶을. 이 사람 저 사람 달라붙어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매만지고, 무슨 옷을 입을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무얼 먹어야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무얼 먹어야 할지 일일이 다 정해주는 삶을. 엄마는 명함을 받고 그냥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임을 알았다.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 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 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 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엄마!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반복해서 외치던 그 말. 목국멍 깊은 데서 터져나오는 원초적인 한국식 흐느낌. 한국영화와 연속극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 엄마가 자기 엄마와 동생을 위해 울면서 냈던 그 소리. 고통에 찬 비브라토로 시작해 점점 스타카토로 이어지다 나중에는 작은 돌기에 퉁퉁 부딪히며 떨어지듯이 끝나는 그 소리.

하지만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거운 숨만 몰아쉬었고, 들숨소리는 갈수록 뜨문뜨문해졌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는 형용사였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그것은 엄마의 묘비명에 새겨넣기에도 따가 알맞은 단어였다. 자애로운(loving) 엄마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지만 사랑스러운(lovely) 엄마는 온전히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예쁘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작고 예쁜 얼굴.
내가 어렸을 때 듣던 말이지만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따.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내 얼굴에서 찾으려하던 게 점점 희미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 내 옆에서 내 존재를 납득시켜줄 온전한 누군가가 없었다. 나는 얼굴 윤곽이건 피부색이건, 내 소중한 반쪽을 나타내던 것이 유실되기 시작해 두려웠다. 마치 엄마와 함께, 내 얼굴의 그 부분들에 대한 권리마저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나는 이모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모음 소리라도 따라 내면서 멜로디를 좇아가려 애썼다. 저 깊은 곳에 존재했을 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느 기억을, 혹은 어떻게든 내가 접했을 엄마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모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게 느껴졌다. 지난 한 주 동안 내가 이모에게서 찾으려 하던 것이었다. 이모가 나의 엄마도, 내가 이모의 동생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그다음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H마트에서 울다
『H마트에서 울다』는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보컬이자 한국계 미국인인 미셸 자우너의 뭉클한 성장기를 담은 에세이다. 출간 즉시 미국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2021년 뉴욕 타임스, NPR 같은 유수의 언론매체와 아마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버락 오바마 추천도서에 꼽히기도 했다. “우리 엄마만 왜 이래?” 여느 미국 엄마들과는 다른 자신의 한국인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딸은 뮤지션의 길을 걸으며 엄마와 점점 더 멀어지는데…… 작가가 25세 때 엄마는 급작스레 암에 걸리고 투병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만다. 어렸을 적부터 한국 문화를 접하게 해준 엄마를 떠나보내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희미해져감을 느끼던 어느 날, 작가는 한인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해 먹다 엄마와의 생생한 추억을 되찾는데, 『H마트에서 울다』는 그로부터 얻은 위안과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나간 섬세하고 감동적인 에세이다.
저자
미셸 자우너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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