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은 확실히 선 구매 후 방치 다음 읽는 코스라고 하지만, 이 책은 나의 조그마한 양심에 쿡 찌를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책장에 숨어 있었다. 정확히 숨어있었다. 책장이 반토막이 나고 떨어진 책 사이에서 존재감을 내뿜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제목뿐 아니라 저자까지 같이 세트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랬으며,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읽어야지 하고 있었지만 끝내 읽지 않았던 그런 책. 누구나 1권이 아니라 10권 정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완독 후에 읽은 저자의 프로필을 읽고 나서 깨달았다. 주인공인 요조는 마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를 완전히 투영했다고 할 수 없지만 반영했다는 것을 말이다. '자전적 소설'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를 할 수 있게 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마담이 가리키는 요조는 순수하고 자상한 사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즉 요조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타인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인물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이 사회에서 소외되어 (삶 속에서) 자살과 알코올 중독, 마약에 의존한 사람으로 살았던 거 같다. 동시에 드는 생각이 수용된 삶에 익숙해져서인지 '집'에서 벗어날 생각도,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거 같다. 그냥 다 포기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모든 것에서 단절된 요조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기만의 투쟁을 하는 느낌이었다. 짧다면 짧은 투쟁이었겠지만 그 감정과 고뇌는 요조만 아는 일이다. 


 

<표지>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취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그건 속고 있기 때문이야. 이 아파트 사람들 전부가 나한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나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 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 하는, 저의 이 불행한 기벽을 시게코한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감옥에 가는 일만이 죄는 아니야. 죄의 반의어를 알면 그 죄의 실체도 파악될 것 같은데. ……신, ……구원, ……사랑, ……빛, …… 그러나 하느님한테는 사탄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선에는 악,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대체 뭘까?”

”죄의 반의어는 꿀이지. 꿀처럼 달콤하거든.”

 

이제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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